작년에 진행된 코리아 타임즈 (The Korea Times) 와의 인터뷰에서 하종현은 <접합> 연작의 시작을 떠올리며 '예전에는 기존 질서에 저항하는 데 주력했다.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기성 회화의 고정관념 같은 것 말이다' 라고말했다. 이러한 저항적 태도가 담긴 작품, <접합> 연작으로 하종현은 단색화의대가로 손꼽히게 되었다.
실험적인 것은 자기주장과 부정이 동시에 존재하는 다소 역설적인 과정을 나타내기 마련이다. 하종현의 <접합> 연작 또한 그러하다. 그는 <접합> 연작을1973 년 처음 시작해서 1974년 세상에 선보였다. 하종현은 회화를 오로지 물성그 자체로만 간주했으며, 동시에 창작 행위에 있어서 작가의 개입을 절제했다. Work 74-A (1974)는 <접합> 연작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나무판자를 흰색 오일 물감을 두툼하게 칠한 다른 판자 위에 올린 후에 판자를 밀어내어 나무판자의 성긴 틈 사이를 통해 앞으로 물감이 새어 나오는 방법으로 제작되었다. 동(動)의 물감이 부동(不動)의 나무판자를 만나며 오직 물리학의 법칙에의존해 작품은 스스로 탄생한다. 과학적 실험이라고도 볼 수 있다. 작가의 역할은 작품의 재료를 선정하고 그 재료에 가해질 힘의 크기를 정하는 등 실험적 장치를 설정하는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아니라 실제의빛과 공간을 작업하는 사람이다"[1]라고 말하며 자신을 '미니멀리스트'라기 보다는 '현실주의자'에 가깝다고 주장한 미국 화가 로버트 리만 (Robert Ryman) 의제스쳐와 매우 닮아있다.
Work 74-A 를 처음 마주하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작품의 의미를 해석하기보다 작품이 어떻게 만들어졌을지 고찰해보게 된다. 하지만 작품을 보면 알수 있듯 작품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는지는 꽤 명백한 편이다. 하종현의 작품은 의식보다는 전적으로 감각에 의해 만들어진다. 영국 문학 이론가 테리이글턴 (Terry Eagleton) 이 서양 미학의 기원을 기술할 때 사용한 표현 '영혼의횡포에 대항하는 신체의 무구한 반항'[2]의 예인 것이다.
이후 하종현은 더욱 역동적인 방식으로 작품 활동을 전개해 나간다. 넓게 펼쳐진마대 자루와 마포와 같은 재료를 팽팽하게 당겨 뒷면에 두꺼운 흰색 물감을 바르고 앞면으로 밀어 넣는 방식인 배압법(背押法)이라는 독창적인 작업 방식을구축했다. <접합> 연작의 초기작이 다른 무언가에 지지가 되어 제작되었다면 이후 작품들은 그 서포트를 부인하고, 더 나아가 서포트가 작품에 스며들기까지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하종현은 서구 미학과의 연결을 일체 부인한다.그는 "나는 한국적 추상을 연구하고 싶다. 유럽이나 일본의 추상에 영향 받지 않은 한국적 추상 말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하종현의 <접합> 연작은 대립하는 이념으로 인한 한국 현대사의 질곡이라는역사적 배경에 뿌리를 두고 있다. Work 74-A 를 제작할 당시 대한민국은 일본강점기, 세계대전, 미군정, 한국전쟁 그리고 군사 독재 정권으로 점철된 70년간의 격동의 시기로부터 막 헤어 나왔다. 그리고 이 당시 한국 미술계는 일본 미술계로부터 영향을 받아 서구로부터 유입된 모더니즘 미술 사조를 차용하거나한반도 분단 이후 남과 북의 이질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예술가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하종현의 대담한 예술적 도전은 독립, 개성, 그리고 객관적이고보편적인 진리를 상징했다.
파괴적인 것은 공허함을 초래한다고 믿기에 십상이다. 하지만 하종현의 파괴적 행위는 오히려 그 행위 이외의 것들을 전면에 드러나게 한다. 이것은 그의 작품에서명백히 보여진다. 그가 밀어 넣고, 짜내고, 긁어내고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한 물감으로 만들어진 작품에서 그의 육체적 노력이 여실히 드러난다. 물감이 원하는 대로, 물감 그 자체가 움직이는 대로 놔두어 물감이 흐르거나, 넓게 펼쳐지거나, 번지는 것은 누군가가 조작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중력의 힘으로 이뤄진 것이다. Conjunction 20-11 (2020)과 Conjunction 19-06 (2019)와 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듯 물감의 행위를 탐구해보고자 하는 의지가 바로 하종현이 오늘날까지 <접합>연작을 계속해서 완성해나가고 있는 이유이다.
시간이 흐르며 하종현은 <접합> 연작에 다채로운 색감을 더해갔으며, 자연스럽게 기존 작업 방식도 조금씩 변화했다. Conjunction 20-50 (2020)에서 볼 수 있는다홍색의 모티브가 그 변화를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이 작품은 단일 색채의 물감을 사용해서 제작되었지만, 물감을 마포 사이로 밀어 넣어 물감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뚝뚝 떨어지고, 마포에 흡수되기도 하는 과정 가운데 물감의 색감, 결,밀도는 달라지고, 단일 색채의 물감은 여러 가지의 색채를 띠게 된다. 하종현은40년 넘게 이러한 작업 방식을 고수해오며 오늘날까지 실험을 거듭하고 있다. 4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작가가 처음 <접합> 연작을 시작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통제와 우연이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을까? 아니면 하종현의 작품 활동은 과연 어떤 사람이나 어떤 물체가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지에 대한 시험의 연속이라고 볼 수 있을까? 조작으로부터, 자연의 법칙으로부터, 습관으로부터, 통제로부터 진정 자유로울 수 있는지 말이다.
하종현의 작품은 외부 세계와 무관한 의례적인 행위와는 거리가 멀다. 전문가용도구보다는 칼과 막대기와 같이 일상생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도구로 물감을 움직여서 만들어진 그의 작품에는 작가의 노동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작품의 재료에서는 한국의 전후 (戰後)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작품의 캔버스가 되는 마대와마포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 부대에서 구호 물품으로 보내온 밀과 곡식을 담던 곳으로 멸시와 서러움 가운데서도 살아남고 힘겨운 고난의 세월을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이란 무엇인지 진정으로 증거하는 재료들이다. 하종현은 2017 년 Ines Min 과의 인터뷰를 통해 "<접합> 연작을 처음 시작할 때에는 작품 하나를 만들기 위해 시장이나 노상에서 작품에 필요한 마포를 일일이 구해야 했다"고 말했다. 회화의 전통과 역사에 대한 저항과 대단히 복잡하고 감정적인 현대 사회의 경험을 담은 하종현의 <접합> 연작은 형식주의 미학을 한층 돋보이게 하고 예술의 경험과 실제 현대 생활의 경험을 연결하면서 모더니스트 회화에서 지배적이었던 내러티브에 대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Text by Mark Rappolt. Courtesy Almine R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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